2009/06/2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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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트는 2005년 8월, 미술비평가이자 문화이론가로 유명한 이용우 교수님을 초청하여 ‘백남준의 삶과 예술’이라는 주제로 우리들병원 직원교육을 개최하였던 특강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용우 교수님은 광주 비엔날레 초대 전시 기획실장 및 유네스코 본부 예술상 심사위원을 지내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술비평가이십니다.
미래는 하이터치의 시대라고 합니다. 하이터치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 감성, 그리고 이러한 감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 예술이죠? 현대의 예술, 컨템포러리 아트는 과거 우리가 어렸을 때 미술시간에서 배우던 고전미술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얼마든지 예술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컨템포러리 아트와 관련한 포스팅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술가 백남준은 "플럭서스(Fluxus)"라고 부르던 컨템포러리 아트의 큰 획을 그은 운동의 중심에 있던 예술가입니다. 물론 한국이 낳은 최고의 예술가이기도 하지요. Fluxus에 대해서는 아래 포스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08/12/09 - [Contemporary Art] - 백남준이 참여한 현대미술 운동 ... 플럭서스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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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백남준을 두고 ‘비디오 예술가’라고 부르곤 하는데 도대체 왜 백남준이 비디오 예술가이고, 비디오 예술이 무엇이 길래 백남준을 세계적 반열에 오르는 예술가로 만들었을까요? 오늘은 그 ‘이상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드릴까 합니다.
백남준, 비디오로 예술을 하다.
비디오 카메라가 국제 시장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65년입니다. 소니(SONY)사가 개발해 3대를 미국에 수출했는데 이 가운데 한대는 백남준이 예약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존에프 케네디 공항에 달려가 직접 비디오 카메라를 찾아서는, 마침 뉴욕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를 촬영해 그날 저녁 뉴욕의 시네마 테크에서 방영을 합니다. 뉴욕에 최초로 출시된 비디오카메라를 가지고 그 현장을 찍어 최초의 비디오를 상영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즈는 ‘백남준이 비디오로 예술을 만들었다’는 아주 초보적인 제목을 소개를 하게 됩니다. 이날 백남준은 ‘비디오가 예술에 사용되는 중요한 매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처음으로 세상에 던졌던 것입니다.
60년대 중반의 예술가들은 비디오카메라를 일종의 무기(Weapon)의 개념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왜 였을까요?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가장 강력한 대중 아이콘은 바로 텔레비전이었습니다. 따라서 195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은 'TV에 의해 성장된 세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주의 깊게 보건, 무심히 틀어놓건, TV가 전달해 주는 지식, 정보, 가치 이런 것들을 떠나 TV는 하루종일 켜진 상태로 있습니다. 이처럼 그 소리는 소음이든 비소음이든 상관없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인터넷과 같네요).
이러한 가운데 비디오 카메라의 등장은 시청자를 수동적 입장에서 스스로 현장을 촬영해 비디오를 제작할 수 있는 주체자의 입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결국 비디오 카메라는 TV에 대한 일종의 얼터너티브, 대안의 개념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철학자들이나 미학자들은 ‘무기로서의 TV’를 구체적으로 ‘화학 무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오가닉 웨폰(Organic Weapon)’이 아닌 ‘케미컬 웨폰(Chemical Weapon)’, 즉 ‘오염’을 의미하는 것이죠. 정보소스에 의해서, 마케팅이나 스폰서에 의해서, 그 밖의 다양한 방법에 의해서 오염된 것이 바로 TV입니다. 이에 반해 비디오 카메라는 개인에 의해 촬영되기 때문에 조작, 왜곡될 위험이 적고 정보의 출처를 명확히 밝힐 수 있습니다 (웹 1.0과 2.0의 차이 같지요?).
이런 의미에서 비디오 카메라야말로 굉장히 유기적인 방법에 의해서 제작된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디오를 무기로 TV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예술가적 제스츄어를 처음 실천한 사람이 바로 백남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돌연변이
범상치 않은 백남준의 면모는 이미 청소년기의 일화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백남준은 보통 예술가들과 달리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부친은 개성인삼을 홍콩에 독점수출하던 유명한 사업가였고 조부는 조선조 말기 왕실에서 모든 제복을 담당하던 분으로, 당시 동대문시장의 70%를 그 집안에서 점유할 정도로 유복한 가정 출신이었죠. 피아노에 소질을 보여 10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14살 때 처음으로 조벽암 선생의 시에 곡을 붙여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첫 작곡을 14살 때 했을 만큼 음악에 천재성을 보였고, 그 후로 전부 다섯 곡을 작곡했는데 이 가운데 한 곡을 독일에서 발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16살 때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는데 경기중학의 좌파 그룹에 속해 철저하게 마르크시스트를 자처했던 소년은 마르크스 군대들을 맞이하겠다는 신념에 피난을 떠나지 않고 집에 혼자 남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마르크스 주의에 회의를 품고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대에 입학합니다. 상과를 지망하라는 부모님을 속이고 미학과에 입학한 것이죠. 이를 계기로 부친은 사업가로서 백남준은 예술가로서 사실상 철학적인 이별을 하게 됩니다.
졸업 후 그는 음악적으로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독일로 건너갑니다. 독일 프라이브루그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며 1950년대에 세계를 주름잡던 전위 음악가들을 전부 다 만날 수 있었는데, 이는 백남준이 예술가로서 국제적인 안목을 갖고 데뷔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특히 서양의 사상가이자 작곡가이기며, 전위 예술가이기도 한 존 케이지와의 만남은 그의 예술적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백남준은 1957~1958년에 걸쳐 다름쉬타트에서 열린 전위음악제에서 케이지의 강의를 듣고 나서 존 케이지를 스승이라고 부르기 시작해 끝까지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존 케이지는 동양사상에 입각해 서양음악을 비판하였습니다. 옥타브 개념 안에서의 음악은 사상과 미학을 표현하는데 있어 한계가 분명하며 계급성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고, 모두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음악적 요소로 보았습니다. 메뚜기 소리, 산모가 출산하면서 내는 소리, 비명소리 등 .....
백남준이 비디로 예술을 통해 보여준 공격성은 존 케이지의 전위적 예술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
백남준이 활동했던 1960년대는 의식의 자유를 누리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백남준은 실존에 대한 회의와 기계문명의 비판에 기초한 다다이즘의 정신을 이어간 ‘플럭서스’의 창시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건축가 화가, 소설가, 시인 등 다양한 예술가 집단으로 결성된 플럭서스는 첫 모임에서 음악과 퍼포먼스를 소재로 한 페스티벌을 열었습니다. 이날 백남준은 2분 동안 소변을 보는 퍼포먼스를 직접 연출해 대상을 수상하고 결정적인 예술가로 등장하게 됩니다.
독일신문(프랑크프루드 알게마이네)은 이런 백남준을 보고 '아시아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고 보도했습니다. 이후 음악과 깊은 인연을 가진 백남준은 그의 퍼포먼스에서 항상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등장시켜 연주 도중 갑자기 도끼로 악기를 때려 부수는 장면을 연출해 서양인들에게 굉장한 심리적 충격을 던져 주게 됩니다.
이성과 합리주의에 기초한 서양 문화, 그리고 그 우월적 문화의 대표적 산물인 서양 악기가 동양에서 온 체구가 작은 한 사내에 의해 가차 없이 부서지고 무너졌던 것입니다. 이 후 백남준은 TV도 때려 부수고 티브이의 부속을 꺼내 기능을 마비시키는 등 자본주의의 우상들을 하나씩 부수어 나가게 됩니다.
문명에 대한 반성과 한국에의 원초적 그리움이 녹아 있는 오가닉 스타일의 작품들과 백남준이라는 예술가는 아마도 그가 서양인으로 태어났다면 좀 더 세계적인 작품과 예술가로 평가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그가 예술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게될 지는 미지수이지만 저는 그가 한국의 문화적 향기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예술가이며, 진정한 ‘오가닉 아티스트’였음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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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우리들 웹진을 통해서도 발간된 바 있습니다.
우리들 웹진으로 바로가기 ...
하이터치가 강력히 추천하는 책들 ...
이 포스트는 2005년 8월, 미술비평가이자 문화이론가로 유명한 이용우 교수님을 초청하여 ‘백남준의 삶과 예술’이라는 주제로 우리들병원 직원교육을 개최하였던 특강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용우 교수님은 광주 비엔날레 초대 전시 기획실장 및 유네스코 본부 예술상 심사위원을 지내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술비평가이십니다.
미래는 하이터치의 시대라고 합니다. 하이터치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 감성, 그리고 이러한 감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 예술이죠? 현대의 예술, 컨템포러리 아트는 과거 우리가 어렸을 때 미술시간에서 배우던 고전미술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얼마든지 예술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컨템포러리 아트와 관련한 포스팅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술가 백남준은 "플럭서스(Fluxus)"라고 부르던 컨템포러리 아트의 큰 획을 그은 운동의 중심에 있던 예술가입니다. 물론 한국이 낳은 최고의 예술가이기도 하지요. Fluxus에 대해서는 아래 포스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08/12/09 - [Contemporary Art] - 백남준이 참여한 현대미술 운동 ... 플럭서스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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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백남준을 두고 ‘비디오 예술가’라고 부르곤 하는데 도대체 왜 백남준이 비디오 예술가이고, 비디오 예술이 무엇이 길래 백남준을 세계적 반열에 오르는 예술가로 만들었을까요? 오늘은 그 ‘이상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드릴까 합니다.
백남준, 비디오로 예술을 하다.
비디오 카메라가 국제 시장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65년입니다. 소니(SONY)사가 개발해 3대를 미국에 수출했는데 이 가운데 한대는 백남준이 예약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존에프 케네디 공항에 달려가 직접 비디오 카메라를 찾아서는, 마침 뉴욕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를 촬영해 그날 저녁 뉴욕의 시네마 테크에서 방영을 합니다. 뉴욕에 최초로 출시된 비디오카메라를 가지고 그 현장을 찍어 최초의 비디오를 상영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즈는 ‘백남준이 비디오로 예술을 만들었다’는 아주 초보적인 제목을 소개를 하게 됩니다. 이날 백남준은 ‘비디오가 예술에 사용되는 중요한 매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처음으로 세상에 던졌던 것입니다.
60년대 중반의 예술가들은 비디오카메라를 일종의 무기(Weapon)의 개념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왜 였을까요?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가장 강력한 대중 아이콘은 바로 텔레비전이었습니다. 따라서 195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은 'TV에 의해 성장된 세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주의 깊게 보건, 무심히 틀어놓건, TV가 전달해 주는 지식, 정보, 가치 이런 것들을 떠나 TV는 하루종일 켜진 상태로 있습니다. 이처럼 그 소리는 소음이든 비소음이든 상관없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인터넷과 같네요).
이러한 가운데 비디오 카메라의 등장은 시청자를 수동적 입장에서 스스로 현장을 촬영해 비디오를 제작할 수 있는 주체자의 입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결국 비디오 카메라는 TV에 대한 일종의 얼터너티브, 대안의 개념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철학자들이나 미학자들은 ‘무기로서의 TV’를 구체적으로 ‘화학 무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오가닉 웨폰(Organic Weapon)’이 아닌 ‘케미컬 웨폰(Chemical Weapon)’, 즉 ‘오염’을 의미하는 것이죠. 정보소스에 의해서, 마케팅이나 스폰서에 의해서, 그 밖의 다양한 방법에 의해서 오염된 것이 바로 TV입니다. 이에 반해 비디오 카메라는 개인에 의해 촬영되기 때문에 조작, 왜곡될 위험이 적고 정보의 출처를 명확히 밝힐 수 있습니다 (웹 1.0과 2.0의 차이 같지요?).
이런 의미에서 비디오 카메라야말로 굉장히 유기적인 방법에 의해서 제작된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디오를 무기로 TV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예술가적 제스츄어를 처음 실천한 사람이 바로 백남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돌연변이
백남준은 보통 예술가들과 달리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부친은 개성인삼을 홍콩에 독점수출하던 유명한 사업가였고 조부는 조선조 말기 왕실에서 모든 제복을 담당하던 분으로, 당시 동대문시장의 70%를 그 집안에서 점유할 정도로 유복한 가정 출신이었죠. 피아노에 소질을 보여 10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14살 때 처음으로 조벽암 선생의 시에 곡을 붙여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첫 작곡을 14살 때 했을 만큼 음악에 천재성을 보였고, 그 후로 전부 다섯 곡을 작곡했는데 이 가운데 한 곡을 독일에서 발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16살 때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는데 경기중학의 좌파 그룹에 속해 철저하게 마르크시스트를 자처했던 소년은 마르크스 군대들을 맞이하겠다는 신념에 피난을 떠나지 않고 집에 혼자 남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마르크스 주의에 회의를 품고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대에 입학합니다. 상과를 지망하라는 부모님을 속이고 미학과에 입학한 것이죠. 이를 계기로 부친은 사업가로서 백남준은 예술가로서 사실상 철학적인 이별을 하게 됩니다.
졸업 후 그는 음악적으로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독일로 건너갑니다. 독일 프라이브루그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며 1950년대에 세계를 주름잡던 전위 음악가들을 전부 다 만날 수 있었는데, 이는 백남준이 예술가로서 국제적인 안목을 갖고 데뷔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특히 서양의 사상가이자 작곡가이기며, 전위 예술가이기도 한 존 케이지와의 만남은 그의 예술적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백남준은 1957~1958년에 걸쳐 다름쉬타트에서 열린 전위음악제에서 케이지의 강의를 듣고 나서 존 케이지를 스승이라고 부르기 시작해 끝까지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존 케이지는 동양사상에 입각해 서양음악을 비판하였습니다. 옥타브 개념 안에서의 음악은 사상과 미학을 표현하는데 있어 한계가 분명하며 계급성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고, 모두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음악적 요소로 보았습니다. 메뚜기 소리, 산모가 출산하면서 내는 소리, 비명소리 등 .....
백남준이 비디로 예술을 통해 보여준 공격성은 존 케이지의 전위적 예술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
백남준이 활동했던 1960년대는 의식의 자유를 누리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백남준은 실존에 대한 회의와 기계문명의 비판에 기초한 다다이즘의 정신을 이어간 ‘플럭서스’의 창시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건축가 화가, 소설가, 시인 등 다양한 예술가 집단으로 결성된 플럭서스는 첫 모임에서 음악과 퍼포먼스를 소재로 한 페스티벌을 열었습니다. 이날 백남준은 2분 동안 소변을 보는 퍼포먼스를 직접 연출해 대상을 수상하고 결정적인 예술가로 등장하게 됩니다.
독일신문(프랑크프루드 알게마이네)은 이런 백남준을 보고 '아시아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고 보도했습니다. 이후 음악과 깊은 인연을 가진 백남준은 그의 퍼포먼스에서 항상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등장시켜 연주 도중 갑자기 도끼로 악기를 때려 부수는 장면을 연출해 서양인들에게 굉장한 심리적 충격을 던져 주게 됩니다.
이성과 합리주의에 기초한 서양 문화, 그리고 그 우월적 문화의 대표적 산물인 서양 악기가 동양에서 온 체구가 작은 한 사내에 의해 가차 없이 부서지고 무너졌던 것입니다. 이 후 백남준은 TV도 때려 부수고 티브이의 부속을 꺼내 기능을 마비시키는 등 자본주의의 우상들을 하나씩 부수어 나가게 됩니다.
문명에 대한 반성과 한국에의 원초적 그리움이 녹아 있는 오가닉 스타일의 작품들과 백남준이라는 예술가는 아마도 그가 서양인으로 태어났다면 좀 더 세계적인 작품과 예술가로 평가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그가 예술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게될 지는 미지수이지만 저는 그가 한국의 문화적 향기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예술가이며, 진정한 ‘오가닉 아티스트’였음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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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lf Vostell, 비디오 예술의 효시인 Wolf Vostell의 작품 관을 땅속에서 꺼내는 장면, 관속에는 작동되는 티브이를 넣고 매장을 해버림 그리고 티브이는 예술가에 의해서 관속에 매장됐다는 과격한 퍼포먼스를 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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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lf Vostell, 완전히 망가져 보임, 철사로 꽁꽁 묵음. 전시작. 과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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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최초로 티브이를 소재로 한 전시회. 비디오 예술의 효시가 됨. 바닥에 티브이가 전부 널부러져 있다. 티브이를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도록 만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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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티브이에 하나의 자석장치를 하여 브라운관이 이미지가 하나의 선으로 나타나게 함. 이것을 티브이 젠(티브이 참선)이라고 함. 백남준의 출세작 가운데 하나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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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티브이의 속을 덜어내고 흙을 채움. 티브이는 화학적, 상업적, 정치적인 것으로 에디팅 되어 있는데 그 속의 모든 것을 들어내고 화분을 만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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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켜놓은 티브이 위에 말굽자석을 놓으면 이미지가 춤을 추게 됩니다. 이것은 티브이에서 오염된 뉴스가 나오는 게 아니고 아름다운 문양이 나타나게 됩니다. 티브이의 기능이 완전히 전복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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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Beuys, <티브이를 부수는 사람> 피아노가 난자 당하는 상황. 유명한 이바하 피아노를 백남준의 친구인 독일의 예술가 조셉보이즈가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대신하여 부수게 됨. 녹색당의 창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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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로젠 코이스트, <아메리칸 플래그> James Rosenquist, American Flag 미국의 대표적인 것 사이에 티브이를 구성해서 현대 사회의 우상을 표상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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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 Farm, 티브이가 지배하는 의식구조를 공격하기 위해 작동되는 50대의 티브이와 유명한 캐딜락 스포츠카로 전속력을 통과해 불바다를 만듬. 앤트팜이라는 예술가 그룹의 퍼포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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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해밀턴, <오늘날 우리의 삶을 이토록 환상적으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Richard Hamilton, 세계 최초로 pop 이라는 단어를 사용함. 티브이를 현대 문명의 새로운 매력적인 포인트로 생각함. 팝 아트의 효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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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첼로형태의 티브이 연주가 가능한 첼로 형태 티브이의 기능을 정지시켜서 그것을 음악화하고 예술가가 연주하여 오르가닉한 것으로 재창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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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낙관 우리들병원 1층의 작품은 백남준의 조각작품 중의 하나인 ‘안심낙관’이란 작품으로 환자들에게 안심하고 낙관하라는 직관적인 말들로 이런 백남준의 어투는 일제시대의 구어투를 사용함. 어투의 향기가 그대로 드러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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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우리들 웹진을 통해서도 발간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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